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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동, 천 년의 역사를 품은 통샘

 

우리는 동네 어구에 있는 소소한 물건이나 유적을 잘못하면 놓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풍부한 물질이 풍부한 세상에서는 예것을 너무 소홀이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년 역사를 간직한 남구 사직동은 주민자치회에서 통샘을 복원하여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에서 사직동 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첫 번째 골목 사거리에서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정겨운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통샘입니다.

 

통샘은 무심한 이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수 있지만, 과거 이 샘물을 마시며 삶을 일구었던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생명의 원천이자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통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샘물을 매개로 서로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풍족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당시 사람들이 샘물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통샘은 단순히 물을 얻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아낙네들은 샘터에 모여 빨래를 하고 물을 길으며 동네 소식을 나누고 정을 쌓았습니다. 통샘은 마을의 소통 창구이자 정보 교류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광장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안내 표지판의 기록에 따르면, 통샘은 원래 성거산 구릉지 아래, 빗물이 모여 흐르는 계곡의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었습니다. 이 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솟아나는 샘물을 식수로 사용하며 삶을 이어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동이라는 마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통샘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것은, 그만큼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통샘이라는 이름은물이 통하는 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샘의 풍부한 수량과 지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추측됩니다.

 

통샘의 역사는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488(조선 성종 19), 광주 현감 권수평은 광주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통샘을 정비했습니다. 이후 약 500년 동안 통샘은 서동 주민들의 식수와 생활용수로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앙로 확장 공사와 주민들의 지하수 개발, 도로 포장 등의 도시 개발로 인해 샘의 수량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통샘은 잊혀질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하지만 통샘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7, 대통령 새마을 훈장을 수상한 김막례 씨가 수상금을 통샘 정비에 기부하면서 통샘은 다시 한번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1차 정비가 이루어졌고, 이후 2008년과 2022년에는 사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통샘을 재정비하여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주민들의 노력과 관심 덕분에 통샘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통샘은 단순한 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이 정주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깨끗한 물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통샘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후손인 우리가 마땅히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사직동이 광주에서 가장 많은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 선비마을로 알려진 데에는, 맑은 물을 제공하는 통샘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통샘이 서동 주민들의 삶과 함께하며 역사를 이어가기를 기대합니다.

통샘은 단순히 물을 얻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아낙네들은 샘터에 모여 빨래를 하고 물을 길으며 동네 소식을 나누고 정을 쌓았습니다. 통샘은 마을의 소통 창구이자 정보 교류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광장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이러한 소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민속 신앙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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