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향교 유학대학 강진 문화 답사
광주광역시 광주향교 유학대학(오수열 학장)은 5월 17일 유학대학 29기 학우 30여 명과 함께 강진군 일원 문화유적 답사를 실시 하였다.
오수열 학장을 비롯한 부회장단 윤만석 29기 학생회장 노영희 총무 문영임 이권진 재무 등 임원진이 주관한 강진군 문화답사는 광주향교에서 8시에 출발 영암에서 깨죽으로 아침 간식을 하고 무위사를 거쳐 사의재 와 강진향교를 답사했다.
이날 강진향교 전교 안영희 전교가 무위사로 마중을 나와 무위사에 전체에 대한 역사 설명과 특히 미륵전에 대한 자신만의 일화를 전해서 무위사의 새로운 전통신앙에 대한 믿음이 충만함을 들었다.
한편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자락에 숨겨진 한국의 보물같은 사찰로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있고 유명한 탱화가 성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천년고찰로 유명한 사찰이다.
천년의 문화와 월출산의 웅장함이 감싸고 있고 수려한 자연의 장엄함과 멋과 향기가 있는 도량으로 누구에게나 권장해도 참 좋은 사찰이다.
대웅전이 그게 보수하고 있어 기계소리가 요란했지만 지난 천년을 계승하고 다가올 천년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고통은 이해와 함께 응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강진 향교 전교는 사의재를 방문하여 사의재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1792-1836) 선생이 거쳐했던 집이다.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철학자 저술가로 한국 역사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앙을 이유로 강진에 유배와서 18년간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선생은 1901년 11월 23일 추운 날 고초를 겪으면서 강진으로 유배왔으나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주막(사의재에서 영업) 주모가 받아줘서 그곳에서 4년간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이 생각과 용모와 언어 그리고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다짐하며 거쳐한 곳이 사의재라고 했다.
사의재는 강진에서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전통문화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입구에 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을 지금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고 느끼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상을 만든 것이다.
강진향교를 방문했을 때 거대하고 우람한 은행나무를 쳐다보면서 유구한 역사를 알아볼 수가 있었고 방문객을 공자의 정신으로 압도하는 것 같았다.
강진향교는 대성전을 대수리하고 있었다. 광주햑교 답사팀은 강진향교 전교의 전례없는 호의에 기념 타올을 전수하고 앞으로의 강진향교의 미래를 전교로부터 청취하였다.
명동식당은 터미널 근처로 많은 손님을 유치하는 식당이었다. 우리는 강진의 향교의 멋진 미래 청사진을 청취하고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명식당에서 강진 여행의 맛을 마음껏 즐기고 다음을 위해 배가 푸짐하게 했다.
초당을 방문했을 때 어떻게 귀양살이 도중에 그 많은 책을 발간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방문했다. 초당은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이는 앞이 툭 터진 초당은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계곡 물이 졸졸 흐르고 손님을 반기듯 솔바람은 솔솔 녹음의 짙은 향기를 선사했다.
다산 초당은 사의재에서 4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초당에서 14년간 유배생활 속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많은 책을 저술한 유명한 가진의 자랑거리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벗어나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실사구시 사상을 집대성한 곳이라고 한다. 또 함께해준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기에 그런 일에 전념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가끔 백련사 스님과 산책하며 나눴을 그 길을 우리가 두 분의 이야기를 걸으면서 흔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또 산고개를 올라갈 수 있을까 넘어갈 수있을까 걱정했는데 마음이 병이었다. 안되는 것은 없었다.
백련사는 오래된 고찰이었다. 신라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만덕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쇄락했다가 1211년 고려 희종 7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에 의해 옛터에 중창되고 백련결사를 맺어 수행하면서 세상ㅇ[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 후기 무시정권 시기에 정치와 종교는 제기능을 상실했고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민중의 삶이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기에 요세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을 열어가고자 했고 현세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백련결사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 땅끝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의 초당이 인접에 있으면서 혜장 선사(1772~1811) 스님과 다산이 소통하고 시대를 논하고 학문을 교류했을 산길을 걸으니 자신이 조선 시대로 역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