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횡단보도와 위험한 지하차도,
칼럼/수필2026. 2. 28. 22:11
-누구를 위한 광주 행정인가?-
세월의 더께가 깊게 내려앉은 43년 된 우리 소형 아파트, 서른 세대의 단출한 보금자리는 이제 아파트라기보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하나의 작은 마을이 되었습니다. 70~80대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어 살다 보니 한때 시끌벅적했던 민원(民願)도 "그저 내 몸 하나 편히 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달관(達觀) 섞인 평온함 속에 잦아들었었지요. 그런데 2026년 새해 첫 반상회(班常會)가 열린 오늘, 고요하던 마을은 분노와 개탄(慨嘆)의 목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주민들의 발이 되어주던 평면 횡단보도를 영구 폐쇄(永久閉鎖)한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현수막이 내걸렸기 때문입니다. 광주시와 광주경찰청은 800m에 달하는 거대한 백운지하차도를 개통하면서, 정작 지상에서 길을 건너던 주민들의 생존권과 이동권은 안중에도 없이 길을 끊어버렸습니다. 세상 천지에 멀쩡히 있던 길을 없애버리는 단체장과 행정 기관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차들은 지하로 편하고 빠르게 지나가게 해주면서,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주민들은 평생 이용하던 횡단보도를 빼앗긴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아가며 걷게 되었습니다.
특히 800m나 되는 초장대 지하차도는 기상 이변이 일상이 된 오늘날, 거대한 죽음의 함정이 될 수 있음을 왜 모릅니까? 우리는 이미 과거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참사와 오송 궁평2지하차도 참사를 통해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기록적인 폭우(暴雨)가 쏟아질 때, 지하차도는 순식간에 급류가 휘몰아치는 수로(水路)로 변합니다. 백운지하차도처럼 유달리 긴 구간에서 침수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아수라장 속에서 시민들이 대피할 길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런 대형 사고의 위험이 불 보듯 뻔함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지상 횡단보도를 없애고 주민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행태를 어찌 위민행정(爲民行政)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한 주객전도(主客顚倒)이자, 주민의 목소리를 철저히 배제한 독단(獨斷) 행정입니다. 광주시와 경찰청은 주민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의견을 물었습니까? 일방적으로 현수막 하나 달랑 붙여놓고 소통을 끝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주민들은 지하차도를 원한 적이 없습니다. 유달리 소나기만 내려도 가슴 졸여야 하는 백운광장의 위험한 지하 시설물보다, 내 집 앞을 마음 편히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 한 줄이 노인들에게는 더 절실한 복지입니다.
반상회에 모인 20여 가구 주민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결의했습니다. 혼자서는 힘없는 노인이지만, 우리 30세대와 주변 아파트와 주택이 뭉친 힘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주민을 기만하는 행정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우리는 횡단보도 존치를 위해 현수막을 내걸고, 구청장과 시장 후보들을 찾아가 정당한 민원을 제기할 것입니다. 만약 횡단보도가 불가하다면, 무릎이 아픈 노약자를 위해 고가(高架)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라도 설치하는 성의를 보여야 마땅합니다.
지방자치(地方自治)의 본질은 주민의 안전과 행복에 있습니다. 주민을 외면한 행정은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 마을 활동가들과 주민들은 끊어진 길을 다시 잇고, 안전한 광주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민초(民草)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한,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행정이라면 길은 반드시 다시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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