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아래서 다시 묻다
“지리는 하늘이 주고, 선택은 사람이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주의 지세를 떠올리면 서울 한양이 겹쳐 보인다. 사방을 감싸는 산줄기와 물길, 평야가 열려 있고 교통이 모이는 형세. 그래서 예로부터 나주를 ‘소경(小京)’이라 불렀다. 작은 수도라는 뜻이다. 그 말에는 자부심과 가능성이 함께 담겨 있다. 하늘이 준 자리, 사람이 일으킬 자리라는 의미다.
나주의 진산 금성산은 더욱 특별하다. 우리나라 여덟 명산 가운데 유일하게 임금으로부터 ‘적령공’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전해진다. 산이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상징이다. 이 땅이 단순한 고을이 아니라 기운이 서린 자리임을 국가가 인정했다는 뜻이다. 금성산은 묵묵히 나주를 지켜보며 수백 년을 서 있었다. 그러나 산의 품격이 곧 도시의 발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백여 년 전, 서양 문물이 밀려들던 격변의 시기에 나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넓은 들과 수운, 사통팔달의 입지를 살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옹고집은 변화를 더디게 만들었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소중하지만, 닫힌 문은 기회를 놓치게 한다. 하늘이 준 지리적 이점을 스스로 묶어 둔 셈이다.
지금 다시 기회가 왔다. 광주와 전남의 통합 논의는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다. 이는 남도 전체의 축을 재설계하는 일이다. 나는 묻고 싶다. 왜 나주가 그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지리적으로 광주와 인접하고, 혁신도시와 공공기관이 이미 자리 잡았다. 평야와 산업, 농업과 에너지가 결합된 도시다. 남도의 허리를 잇는 자리, 교통과 행정의 균형점에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주다.
수도는 단지 인구가 많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상징성과 중심성이 필요하다. 서울 한양이 그랬듯, 산과 물이 감싸고 길이 모이는 자리에서 역사는 꽃을 피웠다. 나주는 그 형세를 갖추고 있다. 금성산이 등 뒤를 지키고 영산강이 흐른다. 자연은 이미 조건을 갖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의 결단이다.
광주전남 통합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 어느 도시가 더 크냐가 아니라, 어디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나주는 소경이라 불렸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작은 수도라는 이름 속에는 남도의 중심이 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중심은 독점이 아니라 균형이다. 광주와 전남을 이어 주는 가교, 농촌과 도시를 잇는 허리, 전통과 미래를 잇는 마디가 되어야 한다.
나는 금성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산은 말이 없지만,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백 년 전 놓친 문명사의 갈림길을 이제는 다시 맞이하고 있다. 하늘이 준 지리를 사람의 지혜로 완성할 때다.
나주가 광주전남의 소재지가 되는 일은 단순한 자리 다툼이 아니다. 남도의 균형 발전을 위한 선택이다. 소경의 이름을 다시 불러 세우는 일이다. 작은 수도의 꿈을, 이번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칼럼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봄의 전령사, 월산근린공원에 내린 노란 설레임 (0) | 2026.02.25 |
|---|---|
| 작은 도시의 큰 꿈, 나주를 생각하며 (5) | 2026.02.16 |
| 금성산 아래에서 배우는 준비의 시간 (0) | 2026.02.16 |
| 이름표 없는 광장, 기억을 잃은 도시 (0) | 2026.02.07 |
| 산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2) | 2026.02.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