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에 채우는 바람의 노래

칼럼/수필|2026. 5. 29. 19:10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因緣)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숨이 막히고 멀어지면 시려옵니다. 젊은 날의 저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곁에 있는 이들의 숨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화물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인간관계(人間關係) 역시 힘차게 밀어붙이면 그만인 줄 알았던 무지(無知)한 시절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관계의 원만함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速度)를 줄인 멈춤에 있었습니다. 마당가에 홀로 핀 채송화 한 송이도 제 자리를 지키며 피어나기 위해 밤새 이슬을 맞이하는 법을 배웁니다.

 

내 손에 쥔 것이 너무 많으면 타인(他人)의 손을 잡아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남의 마음에 먼저 채우려고 가득 찬 잔을 내밀며 살아갑니다. 상대방의 잔이 이미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면, 내가 아무리 좋은 말을 쏟아부어도 그것은 흘러넘쳐 상처가 될 뿐입니다. 원만한 관계의 첫걸음은 내 안의 욕심과 고집을 조금 덜어내어 빈자리를 만드는 허심탄회(虛心坦懷)의 태도에 있습니다. 내 잔을 비워두어야 비로소 상대방의 따뜻한 이야기와 아픈 눈물이 그 안에 온전히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눈을 들어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은 바람과 부딪치지 않고 그저 모양을 바꾸며 흘러갈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조화(調和)로움 속에서 피어났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이 서로 창을 겨누듯 자라지 않고, 가지와 가지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며 숲을 이루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인간관계 역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남과 다정하게 어우러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同調)하며 나를 지우는 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외로운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 은은한 울림을 만들어낼 때, 우리들의 관계는 비로소 깊은 숲처럼 평안해집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오래 남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대방의 거친 숨소리 이면에 숨겨진 외로움을 읽어내고, 그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의 자세가 귀합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내 기준(基準)의 잣대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함께 울고 웃는 일입니다. 마을 활동가로 주민들을 만나고 시민기자로 세상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연을 편견 없이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얼어붙었던 인간관계의 문은 봄눈 녹듯 부드럽게 열리게 마련입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 넓은 하늘이 수많은 별과 달, 그리고 거센 비바람까지 모두 품어 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할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미학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언(助言)이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때 쏟아내는 것은 간섭이 되고, 과도한 친절은 때로 부담스러운 짐이 됩니다. 숯불이 너무 가까우면 고기가 타고 너무 멀면 익지 않듯, 사람과의 거리도 적당한 온도를 유지(維持)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내 생각과 기준이 무조건 옳다는 오만을 버리고,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하며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비움과 경청(傾聽), 그리고 적당한 거리가 어우러질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비로소 향기로운 꽃길이 됩니다.

 

오늘도 저는 조용히 마음의 창을 열고 내 곁의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하나 따뜻하게 떠올려 봅니다. 웅장한 목소리로 세상을 호령하는 것보다,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작은 온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가을날 붉게 물든 단풍잎이 아름다운 이유는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온 산의 나무들이 함께 물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혼자 걷는 독창(獨唱)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합창(合唱)이어야 합니다. 내 안의 고집을 비우고, 가만히 귀를 열어, 다정한 걸음으로 함께 걸어갈 때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