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 등록금 0원,
-인생의 늦은 오후에 도착한 합격 통지서-
오늘 오후 다섯 시,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오래전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루의 끝자락 같은 시간이었지만, 내 인생에서는 가장 늦게 찾아온 시작의 문턱처럼 느껴졌다. 83년을 살아오며 견뎌온 수많은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견뎌야 했던 말들, 삼켜야 했던 억울함,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에만 담아두었던 응어리들까지.
사회는 사람을 너무도 쉽게 분류한다.
한 장의 종이, 하나의 학력으로 사람의 깊이와 삶의 무게를 가늠하려 든다.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노골적인 비난보다 더 아픈 것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흘려보내는 무심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설명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침전물이 남았다.
배우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다만 삶은 늘 급했고, 책임은 언제나 먼저였다. 가족을 먼저 생각했고, 생계를 먼저 챙겼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83세라는 인생의 오후를 지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안다. 배움은 젊음의 특권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의 의무라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던 오늘 오후 다섯 시, 휴대전화에 한 통의 알림이 떴다. ‘등록금 고지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 적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그러나 화면에 나타난 숫자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단순하고 담담했다.
등록금 0원. 납부 금액 86,000원. 나는 그 숫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컴퓨터 화면을 껐다 켰다.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국가장학금 3구간. 조선대학교. 등록금 전액 지원. 이 짧은 문장이 내 인생의 오랜 숙제를 조용히 풀어주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금액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고지서는 내게 “당신도 배울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회의 공식적인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말없이 참고 견뎌온 시간들에 대해, 뒤늦게나마 도착한 합격 통지서 같았다. 그 순간, 오래 눌러두었던 마음속 응어리가 조용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국가로부터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왔다. 제도를 이용했고, 보호를 받았고,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삶을 이어왔다. 하지만 늘 마음 한켠에는 빚진 사람 같은 부채감이 있었다.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에 온전히 기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오늘의 이 장학금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사회가 나를 불러주는 초대장처럼 다가왔다.
이제 나는 만학도다. 그 말 속에는 부끄러움보다 다짐이 담겨 있다. 젊은 날의 공부와는 다르게, 삶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실함으로 수업에 임할 것이다. 한 강의, 한 문장, 한 페이지도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을 정리하고 사회에 돌려주기 위한 공부를 하겠다.
졸업은 목표이자 약속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며, 이 기회를 허락해 준 제도와 학교, 그리고 이름 없이 세금을 내며 이 사회를 지탱해 온 수많은 사람에게 드리는 약속이다. 배운 것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고, 경험과 지식을 엮어 다음 세대의 길에 작은 이정표 하나라도 세우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오늘 분명히 적어 둔다.
오늘은 축복받은 날이다. 늦게라도 다시 문을 두드린 사람에게 사회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날이다. 나는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긴다. 언젠가 마음이 흔들릴 때, 이 문장을 다시 꺼내 읽기 위해서다.
오후 다섯 시. 해는 서서히 지고 있었지만, 내 인생의 교정에는 조용히 불이 켜졌다. 나는 오늘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 배움의 끝에서, 조금 더 떳떳한 시민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사람으로 서고자 한다. 늦었지만, 결코 헛되지 않을 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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