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얼어 굽은 손가락이 남긴 낙서
-그 시린 계절의 초상-
겨울은 시련(試鍊)의 계절이라지만, 요즘의 날씨는 그 도(度)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사흘 춥고 나흘은 볕이 드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자비(慈悲)가 있어 얼어붙은 몸을 녹일 틈이라도 있었으련만, 요즈음은 무자비(無慈悲)한 한파가 열흘이 넘도록 대지를 옥죄고 있습니다. 이 어긋난 기후의 리듬이 가장 아프게 내려앉은 곳은 바로 노인 일자리 현장이었습니다.
마비된 손가락과 어설픈 참여 서명의 형식을 대체할 수는 없을까? 영하의 기온이 며칠째 이어지던 아침, 출결 서명을 위해 모인 80대 여성 어르신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평생 자식 뒷바라지와 험한 일로 마디마디 굵어진 어르신의 손은 매서운 칼바람에 이미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볼펜을 쥐려 해도 손가락은 제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이구, 내 손이 내 손이 아니네. 이게 왜 이런다냐?"
머쓱한 웃음을 지으시며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줘보지만, 마비(痲痺)된 근육은 그저 종이 위를 갈지자(之)로 긋고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정성껏 이름을 남기고 싶으셨겠지만, 결과물은 누구의 이름인지도 알 수 없는 낙서가 되어버렸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동료 어르신들도 "야야, 니 이름이 언제부터 지렁이가 됐냐?"라며 농(弄)을 던지시지만, 그 웃음소리 뒤에는 시린 계절을 함께 견디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애잔함이 깔려 있었습니다.
행정 절차상 그 낙서 같은 서명을 다시 받아야 하는 웃기는 연극이 벌어지는 현장. 몸이 작동(作動)하지 않는데 글씨인들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그 비뚤비뚤한 선들은 추위가 인간의 의지(意志)마저 얼리고 있다는 슬픈 기록(記錄)이었습니다. 이 잘못된 서명 때문에 네명의 반원들이 10일간의 일지에 새롭게 서명해야 했었습니다. 행정의 냉혹함이었습니다.
사라진 삼한사온은 어디로 가고 노인 일자리를 무겁게 할까요? 그리고 기후의 지형 변화는 어떻게 변하기에 서민들에게 불편을 줄까요? 이런 광경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간절히 예전의 삼한사온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지형의 특징이 만들어낸 그 규칙적인 온기는 우리네 삶의 숨통이었습니다. 사흘간의 혹독한 추위 끝에 찾아오던 나흘의 온기는 단순히 기온의 상승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굽은 손마디가 풀리고 다시 팽팽한 삶의 끈을 조일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다정한 배려(配慮)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다정한 리듬은 사라졌습니다. 북극의 찬 공기를 가두던 제트기류(하늘 위에서 아주 빠르고 강하게 흐르는 거대한 공기의 강(江))가 지구 온난화로 힘을 잃고 아래로 처지면서, 한반도는 거대한 냉동고 속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삼한사온 대신 장기간의 혹한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지형은 그대로인데, 그 위를 흐르는 공기가 비정(非情)해진 탓에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에 있는 이들의 고통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상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굽은 손을 보듬는 사온(四溫)의 마음을 불러봅니다. 우리가 지구를 보듬과 감싸주어도 삼한사온이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하는 걱정은 단순한 기우(杞憂)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80대 어르신의 서명처럼 뒤틀린 일상의 모습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이 주는 온기만을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삼한사온이 멈췄다면,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속에 따뜻한 사온(四溫)의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손이 곱아 글씨를 쓰지 못하는 어르신께 다시 쓰라고 재촉하기보다는, 따뜻한 물 한 잔으로 그 손부터 녹여드리는 배려가 절실합니다. 어긋난 계절의 박자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웃의 시린 손을 잡아주는 체온(體溫)이기 때문입니다.
낙서처럼 남겨진 어르신의 서명을 바라보며, 나는 무너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의 도리(道理)를 성찰(省찰)해 봅니다. 비록 하늘은 차가운 바람을 보내더라도, 우리 마음만큼은 언제나 볕이 드는 나흘의 온기를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所望)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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