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이제서야 입학했다
2026년 2월 3일.
나는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조선대학교 등록금 0원, 학생회비 8만 6천 원. 화면에 뜬 ‘등록 정상 처리’라는 문구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여 꿈은 아닐까, 다시 로그인해 보고, 다시 눌러 보았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그 한 줄의 문장은 내 인생의 한 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올해로 여든셋. 사람들은 말한다. “이 나이에 무슨 대학이냐”고. 그러나 나는 오늘 비로소 입학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다시 입학한 날이라고.
젊은 날,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삶은 늘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했다. 서른과 마흔을 지나며 동창들이 “어디 대학 나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때면, 부러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작아짐이 따라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병고로 휴학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 희망은 나주비료공장이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였다. 그러나 인생은 늘 다른 길로 나를 데려갔다. 그 또한 복이라 여기며 나는 가방끈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순간부터 삶은 각박했고, 하루하루는 생존 그 자체였다.
군을 마치고 담프트럭 조수로 일했다.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쪼인트 볼트를 조이고 구리스를 주입하고, 밋션을 탈부착하며 야전 노숙을 밥 먹듯 했다. 비와 눈, 기름 냄새와 흙먼지 속에서 손은 굳어갔고 허리는 휘어졌다. 그렇게 운전을 배웠고, 결국 고속버스 운전대에 올랐다. 금호고속에서 34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실어 나르며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황소처럼 일하는 나를 회사는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가장 성실한 노동자가 되려고 애썼다.
노조를 통해 금호타이어 통근버스로 전직한 뒤에도 나는 오래도록 일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네 아이를 모두 출가시킬 수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14년, 일흔하나의 나이에 퇴직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막을 내릴 때라 했지만, 나는 그때 또 다른 문을 열었다.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영상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해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본선에도 올랐다. 늦은 배움이었지만, 늦었기에 더 더욱 절실했고, 그래서 더 뜨거웠다.
2016년, 남구에서 ‘진다리방송’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카메라 하나로 마을을 기록했고, 사람을 담았고 이야기를 담았다. 누군가는 흘려보낸 이야기들을 나는 붙잡아 영상으로 남겼다. 대학 진학도 꿈꾸었다. 광주대학교 사진영상미디어학과를 바라보았지만, 배움과 일자리, 생계는 늘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오늘 나는 조선대학교에 완전 등록을 마쳤다.
나는 안다. 이것이 성적을 위한 배움도, 취업을 위한 도전도 아니라는 것을. 여든셋이라는 숫자는 역사이지, 배움의 자격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다. 국가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서 더 무겁다. 더 성실해야 한다. 배운 것을 나만의 것으로 두지 않고, 지역사회에 돌려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지역사회—평생 살아온 이 땅, 이 골목, 이 사람들에게 남은 힘을 보태는 지역활동가로 살고 싶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는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려놓은 가방끈을 다시 주워 들었고, 끝내 등록 버튼을 눌렀다.”
오늘, 등록금 0원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준 허락이며,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나는 오늘,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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