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한 줄에 담긴 공공의 무게

칼럼/수필|2026. 1. 31. 08:29

서명 한 줄에 담긴 공공의 무게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던 겨울 아침, 남구 시니어클럽 스쿨존 활동 현장에서 나는 공문서가 지닌 무게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여겨왔던 출결부 한 권이 그날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공문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공공의 약속이며, 신뢰를 담보하는 기록이라는 사실을 현장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70, 80대의 어르신들이 두툼한 외투를 여미고 출결부 앞에 섰다. 손은 차가움에 굳어 있었고, 눈은 세월만큼 흐려 있었다. 작은 칸에 이름을 정확히 적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데, 어르신들께는 더욱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 어르신이 자신의 서명란을 지나쳐 다른 분의 칸에 서명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황한 마음에 화이트로 지우고 다시 적었지만, 그 또한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출결부는 새로 작성해야 했다. 출결은 분명했고 활동 역시 성실했으나, 서류는 그 사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공문서 앞에서는 선의도, 사정도 통하지 않는다. 사실은 사실대로, 절차는 절차대로 남아야 한다. 작은 수정 하나라도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공문서는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공공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서명은 하루의 노동을 증명하고, 그 노동은 예산과 행정, 책임과 감사로 이어진다. 이는 바로 공명정대(公明正大)의 원칙이며, 공사구분(公私區分)이 분명해야 공공의 신뢰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노인일자리 활동을 처음 시작하며 가장 크게 느낀 어려움은 일이 아니라 서류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보다, 출결부의 작은 칸을 정확히 채우는 일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노인일자리는 단순한 봉사나 시간 보내기가 아니다.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엄연한 노동이며, 그만큼 기록 또한 엄정해야 한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한 행정은 차가워 보일 수 있으나, 그 바탕 위에서만 제도의 지속성과 신뢰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 손을 떨며 서명을 하던 어르신들의 모습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고 느꼈다. 원칙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충분한 설명과 반복된 안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이다. 형식만 남는 행정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행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해는 예외가 될 수 없고, 배려는 원칙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상호신뢰(相互信賴)가 전제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날 이후 출결부는 더 이상 평범한 서류가 아니었다. 한 줄 한 줄에 담긴 시간과 책임,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약속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화이트 자국 하나가 가르쳐 준 교훈은 결코 작지 않았다. 공문서는 공공의 얼굴이며, 그 얼굴은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 작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 결국 큰 신뢰를 만든다.

 

노인일자리는 나이 든 세대의 마지막 사회 참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공공의 현장이다. 그 현장에서 서명 한 줄은 곧 공공의 무게다. 나는 그 무게를, 그날 차가운 출결부 앞에서 비로소 제대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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